1mm의 갈등 – 1. 나의 가장 젊은 날
일찍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내의 아침 첫 수술 순서가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경외과 병동, 환자에겐 투병의 지친 하루가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6인실의 수술 병동은 아침 특유의 차분함과 묘한 긴장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아내의 모습을 살피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밤새 수술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이 틀림없다. 물으니 말없이 희미하게 웃는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사이클 속에서 삶을 엮어간다. 살면서 질병은 피할 수 없는 멍에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시련과 인내의 강(江)인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이래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내려진 재앙의 산물이다. 건강했던 아내가 마흔 나이를 넘기며 당뇨를 시작으로 고혈압, 신경증 등의 투병 길에 접어들었다. 이번은 뇌동맥류라고 했다.
전날, 인턴의(醫)가 수술동의서를 앞에 놓고 설명을 해 주었다. 수술 중 뇌출혈, 또는 뇌경색으로 인한 위험한 이차 수술의 확대 가능성과 최악에는 걸어 들어와서 죽어 나갈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으레 하는 소리로 여겼지만 왠지 뒷목덜미가 뻣뻣해왔다. 아들, 딸에게도 설명과 동의까지 요구했다. 일말의 두려움과 수술에 대한 후회 같은 것이 밀려 왔다.
조금 떨어진 휴게실에서 아내가 눈은 TV를 향해 있었지만, 귀는 인턴이 하는 말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워 듣고 있었다.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동의서에 서명하고 아내의 곁에 앉으며 태연하게 일렀다. 아주 간단한 시술이니 걱정 말라 한다고 하니 아내는 오히려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도 다 들었어요. 세 시간이 간단한 수술이에요?”
아차! 싶었다. 불안해하는 표정에 신경 쓰였으나 할 말을 잇지는 못했다.
두려움이란 매우 큰 심리적 압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손가락 끝의 조그마한 상처도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느껴지는데, 전신마취를 하고 복잡한 뇌 속의 혈관을 건드린다는 사실 자체의 상상만으로도 아내에겐 그것은 너무나 큰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이리라. 따로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아이들한테는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나름의 삶의 궤적을 그려가는 생활인이다. 일상을 깨고 비상벨을 울리듯, 번거로움을 안겨주는 게 싫었다. 하지만 수련의가 자신의 임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그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서울, 큰딸의 전화번호를 일러주고 말았다. 통화를 한 큰딸도 적이 놀라 급히 내려온다고 했다. 모처럼 든든한 원군처럼 위안이 되었다.
아침 회진시간, 집도의(醫)K는 그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힌다고 평판을 듣는 사람이다. 뜻밖에 그는 한 시간 후에 수술 받을 환자인 아내에게 말했다.
“시술이 뇌 한가운데로 쉽지 않은 곳입니다. 어쨌든 잘 해 보입시다!”
놀랐다. 자신감을 실은 격려의 말이나 ‘쉽지 않다.’는 소리가 부담스러웠다. 아내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불안을 숨긴 굳은 표정에서 찔끔 눈물까지 비치는 듯 했다. 본능적인 삶에 대한 애착과 두려움 때문인가. 안쓰러웠다. 그 모습에서 혼란과 함께 심한 갈등이 밀어 닥쳤다.
“K 선생님! 우리 환자, 수술을 뒤로 미루면 어떨까요?”
하마터면 이렇게 수술을 거부하겠다는 소리가 터져 나올 번했다.
신병 훈련을 받게 되면, 매를 먼저 맞고 졸업하는 이등병 계급장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그처럼 수술이 끝나 링거 밀대를 밀고 다니는 환자가 역시 그랬다. 그들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생사의 기로는 넘지 않았는가. 운명의 그림자가 건너야 할 깊은 강물처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창밖은 때 늦은 가을비로 추적이었다. 붉은 벽돌 건물 벽 위에 누렇게 탈색된 담쟁이 잎이 밝게 반사되고 있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떨어지는 담쟁이 잎을 거꾸로 세고 있는 폐렴환자 존시, 그녀를 위해 아래층 주정뱅이 노화가 베어먼은 떨어지지 않는 잎새를 그리느라 밤새 비를 맞으며 벽에 매달렸고, 그는 결국 꺼져가는 등불을 살려내지 않았는가.
맞은편 침대 주인은 나이가 많은 척추 수술 환자였다. 어제의 보호자는 젊은 아들이었는데 오늘은 깡마른 나이 많은 노인으로 바뀌었다. 남편인 듯하다. 그녀는 링거가 달린 보행기를 밀며 다가와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수술 전은 엄청 두렵지요. 하지만 그건 금방 지나가니 염려 마세요!”
그녀는 디스크 수술이니 생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같은 환우로서 이심전심의 진정어린 위로였다. 용기를 주는 마지막 잎새이길 바랬다.
지난 밤, 인터넷 검색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뇌동맥류 크기가 4㎜ 이하이면 굳이 수술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되어있었다. 아내는 겨우 3㎜라고 했으니 오히려 1㎜가 작다. 그럼에도 집도의 K는 단호하게 수술을 주장했다. 수술하지 않으면 항상 시한폭탄을 안고 산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병원에서 의사의 말은 절대적이다. 결국,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점차 그 인터넷 정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수술기준에 1㎜가 못 미치는데 위험을 자초해서 수술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강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 갈등으로 심한 악몽까지 꾸었다. 그 꿈이 오늘의 일을 예지해주는 듯, 더욱 강한 자력으로 수술을 하고 싶지 않다는 쪽으로 의식을 몰아갔다.
삶과 죽음, 그것은 신의 섭리라고도 한다. 정해진 운명이 따로 있음에 스스로 목숨을 건 도박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집도의(醫) 역시 신이 아니니 않은가. 마지막 재확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회진을 마친 그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어김없이 정해진 수술준비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드디어 수술용 침대로 아내는 옮겨졌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이것 역시 주어진 한 운명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믿기로 했다. 주사위는 이미 손을 떠났다. 조용히 아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당신, 한숨 푹 자고 나면 회복실에 와 있어. 염려하지 마요!”
실려 가는 아내의 침대 한 귀퉁이를 놓는 순간, 또 한 번 운명의 선택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섬광처럼 강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살아오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할 때가 많았다. 전공 선정에서 그랬고 직장 결정에서도 그랬다. 배우자의 선택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겪지 않는 경우는 드물 것 같다. 삶은 이러한 갈등 속에서 후회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미래의 미로를 헤쳐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 시간의 긴장의 긴 기다림을 수술실 앞에서 보냈다. 이틀의 중환자실에서 조바심했으며, 또 다시, 지루한 회복실의 날들을 거쳐 겨우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아내가 퇴원하는 날, 뜻밖에 내게 양 무릎에 심한 관절통이 찾아왔다. 신경성이라고 했다. 1㎜의 짙은 갈등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1943년 9월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화공과를 졸업하였으며 1967년 군제대 후 울산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울산에 둥지를 틀었다. 그 뒤 동서석유화학(주)과 가원산업(주)으로 회사를 옮겨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1988년 직장생활을 청산하였다.
이후 화공약품 제조, 도소매업인 영남화공약품(주)을 시작으로 자영업에 발을 들여놓았고, 폐기물 처리업체인 (주)삼우이엔텍을 인수,운영하다가 정리하였다.
1995년 7월 다시 건축자재 제조 및 건설업체인 한국하트랜드(주)와 (주)우주를 설립,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013년 계간 <<동리목월>>에 수필 [일장 일막]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였고, 2012년 JTI문학상, 2013년 등대문학상, 2013 2014년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2회), 2015 2017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2회)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울산문인협회, 울산수필동인회, 울산남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mail : domy1@hanmail.net

도무웅